빛.나다

빛.나다 심리상담, 꿈분석, 부모됨 모둠(양육 교육 및 상담)을 통해 무의식의 의식을 비추어 ‘나’로 회복하는 공간 [빛.나다]는 심리상담을 통하여 무의식에 의식의 빛을 비추는 시공간입니다. 이야기상담, 꿈상담, 모래놀이상담으로 진행합니다.

—나의 행복_1(…)스스로 행복해질 수 없는 자는 남의 행복을 위해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나는 나 자신 속에 행복해야 할 절박한 의무를 느낀다. 그러나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남에게서 빼앗아야 비로소 얻을 수 ...
24/10/2025

—나의 행복_1

(…)스스로 행복해질 수 없는 자는 남의 행복을 위해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나는 나 자신 속에 행복해야 할 절박한 의무를 느낀다. 그러나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남에게서 빼앗아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행복은 가증스럽게 여겨질 뿐이다.

나로서는 배타적인 소유에 대해서는 늘 혐오감을 느꼈다. 나의 행복은 오로지 증여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죽음도 내 손에서 빼앗아 갈 것이 별로 없다. 죽음이 내게서 앗아 갈 수 있는 것이란 기껏해야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서 손에 넣을 수도 없는 자연적인 재물, 만인이 다 가질 수 있는 재물뿐이다. 특히 그런 것들이라면 나는 물릴 정도로 만끽했다. 그 밖에 나는 가장 잘 차린 산해진미보다는 주막집의 식사를, 담장을 둘러친 가장 아름다운 정원보다는 공원을, 희귀본보다는 산책 갈 때 마음 놓고 들고 다녀도 좋은 책을 더 좋아한다. 그리고 어떤 예술 작품을 오직 나 혼자서만 감상해야 한다면 그 작품이 아름다울수록 즐거움보다는 슬픔이 앞설 것이다.
나의 행복은 남들의 행복을 증가시키는 데 있다. 나 자신이 행복하려면 만인이 행복해질 필요가 있다.

―앙드레 지드 André Gide, 김화영 옮김, 『지상의 양식 Les Nourritures Terrestres』(민음사, 2007)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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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언젠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짝사랑 사연을 듣고 저녁을 먹는 내내 친구를 응원하고 설득하여 결국 고백하도록 한 적이 있다. 고백을 하자마자 달려온 친구의 희열이 나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어 ‘아, 나는 남을 행복하게 할 때 내가 행복하구나’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어렸을 때부터 나의 삶을 관통했던 가톨릭의 교리—‘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30대 중반까지 나의 삶을 이끌었다. (이 성경 구절이야말로, 다시 되짚어보고 해석해 볼 문장이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 나의 행복이 되는 일’은 남들이 봤을 때(남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고, 그것은 지드가 [새로운 양식]에서 쓴 “나 자신이 행복하려면 만인이 행복해질 필요가 있다”라는 문장과 얼핏 보면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문장에는 중력을 뒤집어야 할 만큼의 구심점의 차이가 있다.

_다음 포스트에 계속

—나의 행복_2‘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 나의 행복’이 되려면 나의 삶의 구심점은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 남편/아이/애인/친구/상사/동료는 내가 어떻게 해야 행복할까?’를 생각해야 한다. 끊임없이. ...
23/10/2025

—나의 행복_2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 나의 행복’이 되려면 나의 삶의 구심점은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 남편/아이/애인/친구/상사/동료는 내가 어떻게 해야 행복할까?’를 생각해야 한다. 끊임없이. 나는 그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나를 ‘희생’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그 희생은 반드시 보상을 원한다는 것을. 내가 희생한 만큼 나는 다른 사람에게 보상을 바라게 되어 있다. 그리고 운명적으로 그 보상은 절대 내가 원하는 때, 내가 원하는 형태로 나에게 돌아오지 않는다. 그 뿐인가. 행복하게 만들어 주려는 타인들 간의 이해관계 때문에 내가 한 사람을 행복하게 하려면, 다른 사람은 행복하지 않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결국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방법 따윈 없다.

하지만 지드는 말한다. “나 자신이 행복하려면 만인이 행복해질 필요가 있다”

“만인”이지, “모두”가 아니다.
또한 “나 자신이 행복하려면’, ’만인이 행복해‘지는 것은 필요이지 전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나의 행복은 남들의 행복을 증가시키는 데 있다”는 지드의 깊은 깨달음의 구심점은 어디에 있을까?
바로 에 있다. 나의 행복이 먼저다.

“스스로 행복해질 수 없는 자는 남의 행복을 위해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스스로 행복해질 수 없으면 우리는 반드시 타인을 통해 내 행복을 찾으려 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든 행복해지려 한다. 물론 여기에서 행복은 단순히 피어오르는 기쁨 같은 것이다.— 이때 우리는 앞서 말한 ‘희생과 보상’이라는 무의식적인 계산에 들어가게 된다.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했는데, 지금 니가 나한테 이래?’ 이런 마음이 올라오는 것이다. ‘내가 너한테 잘한 이유’는 ‘네가 행복해야 나도 행복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잠깐은 그렇게 느끼고 믿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안다, 그것이 지속 가능한 나의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남을 통해 얻고자 하는 행복은 더 정확히 말하면 뺏은 행복에 가깝다. 겉으로는 남을 위한 것 같지만, 내 힘을 발휘해 남을 행복하게 만든다고 느끼는 나의 우월감이다. 그렇다. 그것은 행복이 아닌 우월감일 가능성이 더 높다.
그래서 지드는 “나의 행복은 오로지 로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말한다. 희생이 아니다, 증여다. 아무런 대가나 보상 없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 그런 행복은 어떻게 가능한가? 지드는 그것이 ’나의 행복’일 때 가능하다고 말한다.

은 무엇인가? 나의 행복은 다른 사람을 통해 얻는 우월감과 어떻게 다른가?
나의 행복은 스스로에게서 온다. ‘스스로 행복해지는 것’이 나의 행복이다.
스스로 행복해지는 나의 행복은 내 안에서 올라와 나를 채우고 흘러 넘친다. 그렇게 넘친 행복이 자연스럽게, 어쩔 수 없이, 남에게도 쏟아지는 것에 가깝다. 이것이 증여다. 대가가 필요 없다. 그것은 다만 흘러 넘칠 뿐이다. 그래서 내가 행복해지면 내 주위의 만인이 행복해지는 기적이 일어난다. 이것이야말로 복음good news이다.

나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행복을 불러 일으키는 기적.

그러므로 ‘네가 행복해서 나는 행복해‘와 ‘내가 행복하면 네가 행복해질거야‘라는 두 문장 사이에는 중력을 뒤집을 만큼의 구심점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 스스로 행복해지는 일을 찾으라.
거기에서 모든 행복이 시작된다.

—별들의 자기 길/앙드레 지드찬가:결론을 대신하여M. A. R. G. 에게그 여자는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하는 별들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저 모든 별들의 이름을 알아요. 저마다의 별에는 여러...
17/10/2025

—별들의 자기 길/앙드레 지드

찬가:
결론을 대신하여

M. A. R. G. 에게

그 여자는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하는 별들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저 모든 별들의 이름을 알아요. 저마다의 별에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지요. 별들은 각기 다른 덕목들을 가지고 있어요. 우리 눈에는 고요해 보이는 저들의 운행은 빠르고 그래서 별들이 타는 듯이 뜨거워지는 것이랍니다. 저들의 불안하고 뜨거운 열 때문에 별들은 급격하게 움직이고 그 결과 찬란하게 빛나지요. 어떤 내밀한 의지가 저들을 충동하고 인도하고 있어요. 저들은 미묘한 열광에 불타올라 마침내 타 버려요. 그래서 별들이 휘황찬란하고 아름다운 거예요.”
“별들은 모두가 서로서로 그들의 미덕이요, 힘인 어떤 유대에 의해 이어져 있지요. 그래서 하나의 별은 다른 별에 의존하고 다른 별은 또 모든 별에 의존하지요. 각자의 길이 정해져 있어서 각자는 제 길을 찾지요. 각각의 길은 각각의 다른 별이 차지하고 있으므로 저마다의 별은 길을 바꿀 수가 없어요. 그러면 다른 별을 혼란에 빠뜨릴 테니까요. 그 리고 각각의 별은 그가 따라가도록 되어 있는 것에 따라 자기 길을 택하지요. 그 별은 반드시 택해야 하는 것을 스스로 원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기에 숙명적이라고 여겨지는 그 길이 각각의 별에게는 그가 선호하는 길이지요. 저마다의 길은 완전한 의지에 따른 것이니까요. 어떤 눈부신 사랑이 별들을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선택이 법칙을 확정하게 되니 우리는 그 법칙에 좌우됩니다. 우리는 도망갈 길이 없어요.”

―앙드레 지드 André Gide, 김화영 옮김, 『지상의 양식 Les Nourritures Terrestres』(민음사, 2007)中에서

16/10/2025
27/09/2025

Thank you for brilliant writing, directing and performing!
#이세돌

오랜만에 긴 쉼에 들어갑니다.깊이 숨쉬고, 깊이 내쉬고,깊이 만나요.한해 동안 땀 흘려 거둔 것들을풍요롭게 만끽하는 시간이 되길 :)
23/09/2025

오랜만에 긴 쉼에 들어갑니다.

깊이 숨쉬고, 깊이 내쉬고,
깊이 만나요.

한해 동안 땀 흘려 거둔 것들을
풍요롭게 만끽하는 시간이 되길 :)

—공감이 아니라 사랑이어야 한다/앙드레 지드수많은 감미로운 것들을 위하여, 나타나엘이여. 나는 사랑을 소진했다. 그것들이 찬란한 것은 내가 그것들을 향하여 끊임없이 뜨겁게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칠 줄을 몰랐다...
05/09/2025

—공감이 아니라 사랑이어야 한다/앙드레 지드

수많은 감미로운 것들을 위하여, 나타나엘이여. 나는 사랑을 소진했다. 그것들이 찬란한 것은 내가 그것들을 향하여 끊임없이 뜨겁게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칠 줄을 몰랐다. 모든 열정이 나에게는 사랑의 소모, 감미로운 소모였다.
이단 중에서도 이단이던 나는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된 의견들, 극단적으로 우회하거나 서로 대립하는 생각들에 항시 마음이 끌렸다. 어떤 사람을 만날 때면 나는 오직 그의 남들과 다른 면 때문에 흥미를 느낄 뿐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나의 마음속에서 공감(共感)을 몰아내 버리기에 이르렀다. 공감이란 다만 공통된 감동의 인정에 불과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나타나엘이여, 공감이 아니라——사랑이어야 한다.

―앙드레 지드 André Gide, 김화영 옮김, 『지상의 양식 Les Nourritures Terrestres』(민음사, 2007)中에서

—본능의 천적/클라리사 에스테스우리의 마음속에는 나름의 가치 체계와 동기 및 수단을 지닌 여러 존재들이 공존하고 있다. 한 심리학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이런 존재들을 포착해 몇이나 되는지 세어본 다음 이름을 붙이고...
18/07/2025

—본능의 천적/클라리사 에스테스

우리의 마음속에는 나름의 가치 체계와 동기 및 수단을 지닌 여러 존재들이 공존하고 있다. 한 심리학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이런 존재들을 포착해 몇이나 되는지 세어본 다음 이름을 붙이고 이들이 참패한 노예처럼 물러갈 때까지 꽁꽁 묶어둔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행위는 여성의 눈속에서 춤추는 야성적 불을 꺼뜨리고 말 것이다. 그녀의 뜨거운 불길과 모든 불꽃도 꺼져버릴 것이다. 우리는 여성 본래의 아름다움을 타락시켜서는 안 된다. 대신 이 모든 존재들을 위해 야성의 지대를 마련한 뒤 예술이 필요하다면 예술을, 사랑이 필요하다면 사랑을, 치유가 필요하다면 치유를 받도록 해주어야 한다.
내면의 존재들이 이성을 잃고 생각 없이 파괴를 일삼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존재들도 거처를 주어 한 곳에 머무르게 해야 한다. 특히 심리에서 가장 기만적이고 가장 강력한 도주자 그룹은 우리의 의식을 자극하고 봉쇄하기를 원하는데, 이것은 바로 본능의 천적이다.

—클라리사 에스테스 Clarissa Pinkola Estés, 손영미 옮김,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 Women Who Run With the Wolves』(이루, 2013) 中에서

———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존재들을 위해 야성의 지대를 마련해 보도록 합니다.
“예술이 필요하다면 예술을, 사랑이 필요하다면 사랑을, 치유가 필요하다면 치유를” 받을 수 있도록 말이에요.

존재들에게 거처를 주는 꿈을 통해 함께 머물러요.

—김윤아, [4월은 가장 잔인한 달]_1종을 치며 “이제 가면 언제 오나아”를 구성지게 부르는 그녀의 모습은 흡사 상여를 이끄는 여사제 같았다. 그렇게 홀연히 죽은 이들을 부르는, 또는 보내는 삶과 죽음에 경계에 선...
12/04/2025

—김윤아, [4월은 가장 잔인한 달]_1

종을 치며 “이제 가면 언제 오나아”를 구성지게 부르는 그녀의 모습은 흡사 상여를 이끄는 여사제 같았다. 그렇게 홀연히 죽은 이들을 부르는, 또는 보내는 삶과 죽음에 경계에 선 그녀는, 2시간 30분을 꽉 채워 빛과 어둠 사이, 꿈과 현실 사이의 경계라는 작두를 타며 신명나게 자신 안의 불덩이를 토해 놓았다.

T.S.Elliot의 [황무지]에서 인용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을 콘서트의 이름으로 붙이고, 그녀는 잔인함에 대해 노래했다.
공허라는 잔인함, 죽음이라는 잔인함, 그리고 사랑이라는 잔인함.

리처드 도킨스를 인용하며 우리는 단지 ‘유전자의 숙주’일 뿐이라고, 자신은 그 말이 맞다고 믿는다고 말한 그녀는
우리가 뭔가에 매혹되는 것 역시 그저 유전자의 선택일 뿐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렇게나 나약한 존재들, 우리는 그렇게나 공허한 존재들이라고.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녀는 그래서 쉽게 자신을 매혹 당하는 존재로 두는 듯 하다. 그녀가 고백하는 많은 것들에 쉽게 매혹되어 그 매혹에 흠뻑 빠지고, 그것들을 노래하면서 공허함을 채우는 것 같았다. 공허가 자신이 노래하는 원동력이라는 말이 그녀의 생각을 확인시켜주었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절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없음을 확신한다는 그녀의 말에 나는 동의한다. 공감이 아니다. 동의다.
하지만 동의를 하는 순간, 그래서 오로지 혼자일 수 밖에 없는 잔인함이 공감되는 착각이 일었다. 그녀가 노래하는, 타인에게 가 닿을 수 없는, 잔인한 고통을 나 혼자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와 질감이지만 그녀도 느끼는 있다는 위로라는 속으로 빠져들었기 때문에.
마음껏 착각하면서 그녀의 고통 속에서 나의 고통을 만나 신나게 울었다. 2016년 발간된 그녀의 앨범 [타인의 고통]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듣고 나서 듣는 행위가 너무 힘들어 자주 꺼내 듣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그녀의 음악이 BGM이 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배경으로 틀어놓았다가는 온 정신이 그녀의 음악에 포로가 되어 하던 일을 멈추어야만 하므로.
그녀는 그렇게 그 누구와도 공감할 수 없다는 자신의 깊은 고통 속으로 나를 초대하여 쉽사리 보내주지 않곤 했는데.
더군다나 콘서트 홀에 갇힌 수인의 상태로는 오죽했겠는가.
나의 오감을 사로잡는 그녀의 고통 속으로, 나의 고통을 만나러 들어가는 수 밖에.

유전자의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행할 뿐인 공허한 삶에서, 타인에게 절대 가 닿을 수 없는 가혹한 현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사랑 뿐이지 않겠냐고 그녀는 말한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말한다, 잔인한 사랑을. 사랑은 고통이다. 사랑은 언젠가 끝난다. 영원한 것은 없다. 그러나 완벽한 사랑이 있다. ‘완벽한 사랑?’ 궁금증이 이는 순간, 그녀가 관객석의 불을 밝혀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 완벽한 사랑은 있어요. 여러분은 완벽한 사랑을 뭐라고 생각하세요?”
“엄마의 사랑이요”, 전 엄마가 둘인데, 엄마들을 노래해야 한다면 십일을 해도 모자라요.
“조물주의 사랑이요”, 전 신을 믿지 않아서.
그녀는 앞전에 이미 말했다. 인간은 공허해서 뭔가 확실한 것을 불들려고 한다고. 그래서 누군가는 종교를 갖고, 결혼을 하고, 애를 낳는다고.
그건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완벽한 사랑이 아님에는 틀림 없었다. 궁금증이 극에 달할 때쯤, 그녀가 마이크를 잡고 다시 말했다.
“완벽한 사랑은, 가질 수 없는 사랑이에요.”
가질 수 없기 떄문에 사랑 그 자체만 남는 것, 그래서 완벽할 수 있는 것.
말장난인가 싶어 고개가 갸웃거리다가 어느새 고개가 끄덕여졌다.
매혹 중에서도 파국으로 치닿는 매혹, 그런 사랑은 사랑 그 자체로 완벽하게 남는다.
공연 초반에 부른 정훈희의 ‘안개꽃’이 떠올랐다. 이제는 그 노래와 뗼레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된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의 마지막 장면도 함께.
바닷물 속으로 사라져 완전한 미제 사건으로 남아버린 서래의 사랑. 안개 속에서, 파도 속에서 “서래씨이!”를 외치며 헤매이던 해준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것은 가질 수 없는 것으로 남아버린, 그래서 영원이 되어버린 사랑에 대한 인간의 깊은 향수 때문이 아닐까.

—김윤아, [4월은 가장 잔인한 달]_2작년에 나온 그녀의 앨범 [관능소설]에는 매혹 당하고, 그렇게 빠지고, 다시 또 “마지막 장면에서”, “냉정히 입맞춤도 없이 돌아서 가는” 사랑이, 그녀가 가득 그려져 있다. ...
12/04/2025

—김윤아, [4월은 가장 잔인한 달]_2

작년에 나온 그녀의 앨범 [관능소설]에는 매혹 당하고, 그렇게 빠지고, 다시 또 “마지막 장면에서”, “냉정히 입맞춤도 없이 돌아서 가는” 사랑이, 그녀가 가득 그려져 있다.

얼마 전 오랜만에 이소라의 [봄밤 핌] 콘서트를 다녀와서는, 오랜 시간 잊고 산, ‘상실의 고통’을 떠올렸었다. 사랑하는 이를 상실한 고통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나를 잡아끄는 소라 언니의 동굴 속에서 고통스럽게 사경을 헤매다 콘서트 홀을 나오면서, ‘아, 나 살아있구나’ 하는 마음이 피어올랐다.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은 고통 덕분이다. 고통을 느낄 때 우리는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실감하기 때문이다. 나는 소라 언니의 음악을 들으면서 내 삶에서 떠나보낸 사랑했던 이들을 떠올렸다. 그들을 추억했다. 이소라의 음악은 상실한 이들이, 완전히 상실된 것이 아니라 하늘의 별이 되어 어딘가에 떠 있으리라는 어둠의 환상 안으로 나를 데려갔으므로 그들을 그렇게 떠올리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곳은 어둡지만 따스했고, 축축하지만 포근하게 느껴지는 환상의 시공간이었다. 그것은 견딜 만한 고통을 아름답게 해 주었다.

하지만 김윤아의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에는 환상 따위는 없었다. 두 발을 온전히 땅에 딛고 나는 너, 어둠을, 공허를, 죽음을, 고통을 직시하겠다는 강렬한 그녀의 의지가 그녀를 맨발로 작두 위에 올려놓았는지도 모른다. 이 어둠은 현실적이고, 만져질 정도로 구체적인 것이었다. 김윤아의 음악을 몽환적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만, 사실 그것은 몽환이 아니었다. 몽환으로 두고 싶었던 것은 고통을 피하고 싶었던 나의 욕망이었으리라. 누구를 상실한 것인지, 구체적인 대상이 떠오르지 않는 상실 그 자체의 고통, 누구를 사랑한 것인지, 구체적인 대상이 떠오르지 않는 사랑 그 자체의 고통 앞에서 나는 온 마음을 열고 울 수 있었다. 울어야 했다. 그녀가 그 경계까지 나를 끌고, 밀고 갔기 때문에.

공연을 보고 하룻밤이 지나고, 공연을 본 지 24시간이 되어가는 지금도, 가슴이 가끔, 아니 자주 욱씬거린다.
그녀의 포효가 나의 유전자에 길을 하나 터 놓은 것 같이, 이제는 그녀의 공연을 보기 그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이, 내가 그녀에게 매혹되었기 때문이다. 아프고, 고통스러워 매일 들을 수도, 가볍게 들을 수도, 가까이 들을 수도 없지만, 이 매혹이 내 기억에서 지워지기 전에 나는 반드시 다시, 그녀에게 매혹당하기 위해 그녀를 찾을 것이다. 나의 유전자에 선명하게 새겨진 이 길을 자국으로 남게 할 수 없으므로. 이 길을 이어가라는 내 유전자의 명령에 따라 나는 숙주답게 내 삶을 살아내야 하므로.
당당하게 다시, 또, 흠뻑 매혹 당하기 위해서.

김윤아를 만나러 갈 그 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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