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4/2025
—김윤아, [4월은 가장 잔인한 달]_2
작년에 나온 그녀의 앨범 [관능소설]에는 매혹 당하고, 그렇게 빠지고, 다시 또 “마지막 장면에서”, “냉정히 입맞춤도 없이 돌아서 가는” 사랑이, 그녀가 가득 그려져 있다.
얼마 전 오랜만에 이소라의 [봄밤 핌] 콘서트를 다녀와서는, 오랜 시간 잊고 산, ‘상실의 고통’을 떠올렸었다. 사랑하는 이를 상실한 고통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나를 잡아끄는 소라 언니의 동굴 속에서 고통스럽게 사경을 헤매다 콘서트 홀을 나오면서, ‘아, 나 살아있구나’ 하는 마음이 피어올랐다.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은 고통 덕분이다. 고통을 느낄 때 우리는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실감하기 때문이다. 나는 소라 언니의 음악을 들으면서 내 삶에서 떠나보낸 사랑했던 이들을 떠올렸다. 그들을 추억했다. 이소라의 음악은 상실한 이들이, 완전히 상실된 것이 아니라 하늘의 별이 되어 어딘가에 떠 있으리라는 어둠의 환상 안으로 나를 데려갔으므로 그들을 그렇게 떠올리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곳은 어둡지만 따스했고, 축축하지만 포근하게 느껴지는 환상의 시공간이었다. 그것은 견딜 만한 고통을 아름답게 해 주었다.
하지만 김윤아의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에는 환상 따위는 없었다. 두 발을 온전히 땅에 딛고 나는 너, 어둠을, 공허를, 죽음을, 고통을 직시하겠다는 강렬한 그녀의 의지가 그녀를 맨발로 작두 위에 올려놓았는지도 모른다. 이 어둠은 현실적이고, 만져질 정도로 구체적인 것이었다. 김윤아의 음악을 몽환적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만, 사실 그것은 몽환이 아니었다. 몽환으로 두고 싶었던 것은 고통을 피하고 싶었던 나의 욕망이었으리라. 누구를 상실한 것인지, 구체적인 대상이 떠오르지 않는 상실 그 자체의 고통, 누구를 사랑한 것인지, 구체적인 대상이 떠오르지 않는 사랑 그 자체의 고통 앞에서 나는 온 마음을 열고 울 수 있었다. 울어야 했다. 그녀가 그 경계까지 나를 끌고, 밀고 갔기 때문에.
공연을 보고 하룻밤이 지나고, 공연을 본 지 24시간이 되어가는 지금도, 가슴이 가끔, 아니 자주 욱씬거린다.
그녀의 포효가 나의 유전자에 길을 하나 터 놓은 것 같이, 이제는 그녀의 공연을 보기 그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이, 내가 그녀에게 매혹되었기 때문이다. 아프고, 고통스러워 매일 들을 수도, 가볍게 들을 수도, 가까이 들을 수도 없지만, 이 매혹이 내 기억에서 지워지기 전에 나는 반드시 다시, 그녀에게 매혹당하기 위해 그녀를 찾을 것이다. 나의 유전자에 선명하게 새겨진 이 길을 자국으로 남게 할 수 없으므로. 이 길을 이어가라는 내 유전자의 명령에 따라 나는 숙주답게 내 삶을 살아내야 하므로.
당당하게 다시, 또, 흠뻑 매혹 당하기 위해서.
김윤아를 만나러 갈 그 날을 기다린다.